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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성지순례] 마사다여행 : 이스라엘 성지순례 2017. 5. 7. 15:25
마사다
1. 마사다 대항쟁
유대 지방은 63 BCE 부터 로마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 사이에서 로마에 대한 반발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이 일어나거나 크고 작은 소요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헤롯이 병상에 있던 4 BCE 에는 바리새인들이 헤롯과 로마에 반대하여서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으로부터도 환심을 사고, 로마 황제로부터도 신임을 얻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공사한 다음 (20 BCE), 성전의 입구에 로마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 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종교적으로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던 바리새인들은 헤롯의 힘이 약해져 갈 무렵에 헤롯에 대해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성전 입구에 있던 이 황금 독수리 상을 부숴 버려요. 종교적으로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심의 표현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반대하는 소요의 불씨로 비춰졌을 겁니다. 로마에서는 이것을 중요한 사태로 인식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였고, 바리새인들의 소요는 곧 진압이 됩니다. 그리고 이 소요를 진압하는데에 로마와 함게 앞장을 선 헤롯의 아들들은 그 대가로 유대의 분봉왕 (Tetrach) 이 됩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잘 알려진 유대인들의 반로마 항쟁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멸망을 야기시켰던 66년의 항쟁이지요. 이 전쟁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 The First Jewish-Roman War 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대항쟁” The Great Revolt 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항쟁의 원인은 하나님 뿐 아니라, 성전에서 황제에게도 신과 같은 급의 경의를 표해야하는 종교적인 이유를 들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너무나 혹독한 로마의 세금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66년에 가이사랴 지역에서 처음 발발한 항쟁은 삽시간에 유대 땅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시리아에 주둔하던 갈루스 Gallus 장군이 진압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곧 황제 네로 Nero 는 베스파시안 Vespasian 을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이집트를 거쳐 유다로 진격하게 하지요. 네로의 갑작스런 하야로 유대지방에 진군하였던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되고 베스파시안은 자기 아들 티투스 Titus 를 유대인 항쟁을 정리할 새로운 장군으로 임명합니다. 이런 로마의 군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이 됩니다.
티투스를 이어서 로마군을 이끈 실바 Silva 가 유대인 반란군의 마지막 무리들이 모여있는 마사다로 72년에 진군을 해 옵니다. 15,000명의 로마군들이 고작 960명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만큼 마사다가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상징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고, 그만큼의 병력이 있어야 점령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로마군들은 먼저 마사다에 있는 시카리들을 고사(枯死) 시키기 위해서 마사다를 둘러싸는 포위 성벽을 쌓습니다. 수천 톤의 돌들이 필요했겠지요. 하지만, 이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것으로 안 로마군들은 직접 마사다안으로 진입하기 위한 군사적인 용도의 비탈길을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비탈길의 위치는 비록 깎아지르는 절벽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은 공사기간이 소요될 서쪽 절벽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아 3개월에 걸친 대공사를 시작합니다. 마사다 안에 있었던 시카리들은 이 공사를 그저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물론 적극적은 공격으로 공사 자체를 방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공사에 동원된 노예들이 모두 자신들의 형제들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공격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그 공사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2. 마사다 회당
대항쟁 시대의 마사다의 역사는 그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 남았던 두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을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사다는 대항쟁이 시작이되던 66년에 열심당 중에서도 매우 과격한 분파였던 시카리 Sicarii 에 의해서 점령됩니다. 시카리 Sicarii 라는 말은 라틴어 Sicarius 의 복수형인데, 그 의미가 “단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옷 주머니에 늘 단검을 지니고 다니면서 언제라도 싸울 준비, 급습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이 시카리의 지도자는 엘르아잘 벤 야이르 אליעזר בן יאיר Eleazar ben Yair 였습니다. 이 시카리들은 같은 유대인 항쟁 그룹 안에서도 사사건건 부딛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포위 당했던 때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시카리들은 유대인 그룹들 안에 서로 의견들이 갈라지면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멸망하기 바로 직전에 시카리들과 그 가족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서 이미 그곳에 66년부터 주둔해 있던 시카리들과 합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주거지 어느 곳에나,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반드시 있는 곳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회당입니다. 회당은 때로는 마을 회관과 같은 기능으로, 때로는 성경공부를 하는 곳으로, 그리고 때로는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법정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마사다라는 곳의 특성상 이곳의 회당의 주된 기능은 기도를 하거나, 마을 회관과 같은 기능이 훨씬 더 강했을 거예요.
로마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그 긴 전쟁이 끝나기 전 마지막 날 밤이었습니다. 시카리의 지도자였던 엘르아살이 모든 가장(家長)들을 이 곳 회당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되지요.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진리되시고 정의로우신 인류의 주인이신 오직 한분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아가겠노라고, 그리고 절대로 로마인들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로마군은 총공격을 해 올 겁니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아내가 능욕을 당하기 전에, 우리 자식들이 노예가 되기 전에 죽음으로 자유를 선택합시다… 우리는 로마인들을 대항하여서 들고 일어선 첫번째의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지금 그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마지막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예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힘이 있을 때에 용감하게 자유인으로 죽읍시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법에 자살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엘르아살은 항아리를 깨뜨리고 깨뜨린 항아리의 파편에 가장들의 이름을 씁니다. 그리고 제비 뽑기를 해서 순서대로 자기 가족들을 모두 죽인 후에 다시 회당으로 돌아오는 거지요. 마지막 가장들만 남았을 때에, 열명을 선택해서 다른 이들을 죽이고, 나머지는 서로 죽여주기로 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만이 스스로 죽어야했으니, 사실 그 한 사람이 960명의 모든 짐을 다 짊어졌다고 해야할 것같아요.
예로부터 전쟁에서 내가 남긴 물건은 적군의 보급품이 되는 법이지요. 그래서 물은 쏟아 버리고, 먹을 것들은 태워버리고, 화살은 꺾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엘르아살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먹을 것을 그대로 두라고 한 것이지요. 먹을 것이 없어서 싸울 것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을 로마 군인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 이곳이 그들이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죽이고, 남은 이들이 찾아와 서로를 죽이며 마지막을 맞이 했던 장소..]
3. 마사다의 건축과 궁전
마사다는 37 BCE 부터 31 BCE 사이에 7년에 걸쳐서 건설되었습니다. 마사다는 남북으로의 길이는 약 550m이고, 동서로의 폭은 약 270m가 되는 다이아몬드형의 절벽위의 도시입니다. 이 절벽의 주위로 약 1.3km가 되는 4m 높이의 성벽이 쌓여 있었으니,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이 요새를 점령하려는 군사들의 사기를 꺾어 놓기에는 충분한 요새이지요. 게다가 이 요새로 올라가는 “뱀 길” (Snake Path) 은 이 요새에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요새에 헤롯은 두개의 궁전을 세웁니다. 하나는 마사다의 서쪽에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궁전입니다.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과 넓은 마당, 그리고 가까운 곳에는 헤롯 왕가 전용의 정결욕조 (또는 헤롯을 위한 전용 수영장) 를 구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헤롯의 궁전의 백미는 마사다의 북쪽 절벽 끝자락에 건설한 삼층 궁전입니다.
뜨거운 광야의 태양과 후텁지근한 바람이 부는 유대 광야의 남단에 자리잡은 마사다에서 지낸다는 것이 왕인 헤롯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헤롯은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그늘을 만들어 주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마사다의 북쪽 끝자락 절벽에 궁전을 지었는데, 매우 호화롭게 삼층으로 건설했습니다.
삼층으로 지어진 궁전의 맨 위는 헤롯의 사무공간, 또는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층의 원형 건물은 헤롯이 즐기기 위한 위락의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맨 아래 궁전은 아름다운 프레스코로 장식되었던 헤롯 전용 공간으로 헤롯 만을 위한 사우나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유대 지역에서는 얼마나 물을 마음 껏 사용할 수 있는가가 곧,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현재의 마사다는 1962년 이스라엘의 암벽 등반가들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어요. 마사다 북쪽의 헤롯의 중간 궁전 쪽으로 올라간 암벽등반가들이 고고학 유적지가 있는 것을 보고 정부에 신고를 하면서 1963년부터 마사다 발굴이 시작이 되었는데, 현재 (2014년) 에 이르기까지 약 50년이 넘는 기간동안 마사다는 줄곳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었습니다. 현재 발굴과 복원이 된 마사다의 건물만으로도 헤롯 시대의 마사다가 얼마나 웅장하고도 위엄있는 곳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는데요, 마사다의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을 보면서, 도대체 이 건물들을 세우기 위한 돌들을 어디에서 가져왔는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사다의 건축물들을 세운 돌들은 어디에서 옮겨 왔는가?마사다의 곳곳에는 이러한 의문점들을 해결해 주는 채석장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 자체가 돌 땅이다가 보니까, 굳이 어디에서 돌을 옮겨올 필요가 없이, 마사다의 절벽 위의 땅에서 돌을 떴다는 것입니다.
마사다가 아무리 철옹성같은 요새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안에서 마실 물이 없다면 진정한 요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무기가 있다고한들 그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가요? 로마 군인들도 바로 그 점을 간파했습니다. 마사다 요새를 올라가기는 힘들지만, 그 많은 인원이 그 위에서 얼마나 버틸까하며 마사다를 포위하고 사람들을 고사시키는 작전을 감행한 것이지요.
아직까지도 실바 장군의 로마 제 10군단이 만들어 놓은 마사다 주변의 로마군 진지와 마사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필품이나 군수 물자를 외부에서 옮겨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마사다를 360도 둘러싼 로마군의 포위 담이 고스란히 광야에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보면서 감탄할 만한 로마군들의 위엄 앞에서 2,000 여년 전의 유대인들은 또 얼마나 위축되었겠습니까만, 결과적으로 로마군의 작전은 실패였습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마사다에는 충분한 물자가 이미 넉넉히 준비된 데에다가 헤롯은 마사다에 엄청난 양의 물 저장고들을 만들어 놓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기 때문입니다.
유대 광야는 대부분 석회입니다. 게다가 유대광야는 그냥 넓직한 평지도 아니라, 경사가 급한 구릉들이 오밀조밀하게 서로 맞대어 이어진 건조한 땅입니다. 그러다보니, 비가 오면 비가 땅에 흡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경사면을 따라서 빠른 속도로 흘러 내립니다. 땅이 물을 머금을 새도 없이 말이지요. 석회의 땅이니 땅 속 어디에선가는 동굴이 생기고, 기다린 동굴 어디에선가는 우리나라의 석회 동굴들처럼 시냇물도 흐르고, 동굴 안에서 강이 흐르고 할 수도 있겠지만, 드러난 지표에서는 물을 찾기도, 구하기도 매우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광야에서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물을 모으는데요, 경사면에 물이 흘러 내릴 수 없도록 돌을 살짝 쌓습니다. 그리고는 물의 방향을 이미 파 놓은 물 저장고 (Water Cistern) 쪽으로 흐리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광야 한가운데 만들어 놓은 물 저장고에 물들이 가득 차게 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헤롯도 유대 광야에서 물을 저장하는 그 방식 그대로를 마사다에 차용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빗물들을 마사다 쪽으로 물길을 틀어 마사다의 절벽으로 향하게 하지요. 그리고 마사다의 절벽 곳곳에 물 저장고들을 파 놓고서는 그 안으로 빗물들이 흘러들어가게 합니다. 이렇게 자연방식으로 매년 우기 때마다 마사다에 저장되는 물의 양이 4만톤입니다. 그러니, 마사다에서 물이 없어 항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 마사다에 구축된 헤롯의 궁전과 사우나시설 ]
[ 사우나시설. 구들장구조. ]
[ 이스라엘은 이 험난한 계곡 위에서 마지막 항쟁을 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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