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데드에 대하여>
<워킹데드에 대하여>
오늘 점심 때, 직전글은 워킹데드에 관해 생각을 써봤다. 나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 좀비영화를 꽤나 즐겨보는 편이다. 액션, 조폭들, 코미디 이런 장르는 보지 않는다. 차라리 정서적으로 아련함을 주는 일본영화 중에서도 드라마나 멜로 장르를 즐겨보는 편이다.
좀비영화를 보면서 늘 생각해봤다. 과연 좀비와 인간의 공존의 시대가 찾아올까? 알 수 없는 질병의 일종으로 도무지 막아낼 수 없는 병원균의 확산과 인류의 위기. 좀비물의 대부분의 스토리다.
좀비물은 사실 후기현대사회의 최종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빈부격차, 개인주의의 왜곡된 극단적 이기주의, 상생보다는 치열한 경쟁 끝에 성공자와 낙오자의 갈라짐. 부의 수치에 따른 인류의 계급화.
이게 시작된 것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지금도 거리를 배회하는 수 없는 노숙자들, 그리고 갈 길 잃은 꿈 없이 땅만 쳐다보며 하루를 비틀비틀 버텨내는 젊은이들. 그런 모든 사람들.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들의 내버려짐. 그럼에도 그들을 우리는 무능함, 쓸모 없음, 사회의 한 층을 구성하는 존재도 아닌 존재하지 않는 듯한 대상으로 치부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삶은 죽었지만 살아있다.
사회로 부터 인정 받자 못하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로부터 존재함이 거북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체와 같은 존재.
그럼에도 그들은 늘 우리 주위를 배회한다. 한 시대 한 땅 위에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무관심과 손가락질과 비아냥 거림으로 그들의 존재함을 늘 거절한다. 그 거절에도 늘상 그들은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늘 인간됨으로 늘 주변에 있다.
영화 속에서는 그들을 갉아먹는 좀비들을 향해 수 없이 총을 겨누고 쏘아댄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 살아나 또 달려든다. 끝이 없다. 대부분 그런 영화의 결말은 좀비로부터 벗어난 안전한 구역을 구축하고 그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사회학적으로 이런 소외 받는 이들이 만약 좀비라면 그들을 완벽히 격리시키고 완전히 등돌림이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부의 재분배와 생존을 위한 필수적 복지정책 등 그들을 좀비가 아닌 한 인격으로 세워줄 동기나 노력은 없는 것일까?
좀비물 영화를 보며 나는 늘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풍자라는 시각에서 영화를 본다
이웃과 좀비는 한 끝 차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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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우리가 좀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좀비? 워킹데드? 죽은 자가 살아 걸어다니는 것.
오늘도 좀비처럼 취급받는 몇몇의 사람들을 길을 걸으며 스쳐지나왔다. 인격을 비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건 너무도 쉽고, 좀비화 시키는 것도 아주 작은 행동으로 시작됨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그들에게 인간됨, 한 인격으로의 존중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더 고민해야겠다.
시대의 괴물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우린 지존파 사건을 통해서도 이미 경험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오늘은 그때와 달라져있는가? 아니. 전혀.
누구의 몫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나 역시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사회가 또 내가 만들어낸 좀비와 공존할 것인가, 인간대인간의 관계로 살아 갈 것인가.
이제 우리가 선택하자. 더 늦기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