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1

<여기 있습니다! "¡presente!" >

letranger.kr 2018. 6. 18. 12:56

<여기 있습니다! "¡presente!" >

부활? 그것이 과연 기쁜 소식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죠!' 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제국의 대량학살과 무자비한 폭력 가운데 죽은 이들은 그저 사라질, 그들이 존재했었음 조차 알지 못하며 그저 잊혀질 그런 사람들, 그런 존재들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 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아직까지 일어난적이 없는 매우 해괴망측한 일이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하더라도, 꿈 속에 망자가 찾아와 억울하게 죽은 자신을 호소하며, 자기를 죽음으로 내 몰았던 사람을 고발하는 정도의 경험만이 그들에게 간혹 있었을법한 일이다.

로마라는 제국 앞에서 수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가치 없이 쓰러져 갔다. 전쟁통에 한마디 대변없이 죽어간 수 많은 이들, 십자가에 처형된 수 많은 사람들, 노예로 잡혀와 원형극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대중들.
그들에게 예수의 부활의 소식은 무엇이었을까?

공포다.

그의 부활은 제국의 위기였다. 즐거워하던 잔치상이 순간 초상집으로 바뀌는 상황이 닥쳐온 것이다. 로마는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빌라도를 고발하러 망자가 다시 살아온 상황? 그 예수? 유대인들에게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메시야 사상을 통해 조금은 드리워져 있었지만 상황이 다르지는 않다. 마지막 때에 죽은자들이 일어난다는 그들의 종말론에, 실제 종말이 찾아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

예수의 부활. 
그것은 무자비하게 죽어간, 제국의 끔찍한 살인, 스테레오타입에 젖어 누군가를 십자가로 매몰차게 내 몰았던 대중들에게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그리고 그 폭력 가운데 죽어간 이들을 죽음의 신의 통제에 있던 그들까지도 끌어내어 그들의 편에 서신 하나님이 '계심'이 선포되어진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함께 계심, 억울한 자들을 다시 일으키심, 그리고 죽음 가운데 내몰린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명의 가치를 다시 부여하신 그 것. 부활이 가져온 로마를 향한 핵폭탄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행동은 그 폭력과 살인은 중단되어야 함이 그들 앞에 선포되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부활로 찾아오셔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과 세상 가운데로 함께 우뚝서신다. 함께. 
아우슈비츠, 그곳에도 이름없이 죽어간, 그저 숫자로만 불리우던 이들이 있었다.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 야드바셈을 들렀을 때 그들을 기억하는 장소를 들른적이 있다.
주님은 부활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

지금도 주님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기쁜소식이 되었다.
죽음과 억울함, 아픔, 질병, 모든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부활은 기쁜소식이 되었다. 그 소식은 땅끝까지 전해지기를 주님은 간절히 소망하셨다.

그렇다. 억울하게 죽음 가운데 내몰린 우리 세월호의 아이들에게도 함께 하신다.
"쁘레젠떼!"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기에 그들은 여전히 여기에 있습니다. 

쁘레젠떼!
우리의 절망과 슬픔이 나를 죽음으로 내 몰아도, 그 때도 주님은 나를 여기 있다고 말씀하시며, 나의 존재를 또렷하게 만들어주십니다. 

¡Presente! Él todavía está aquí

샬롬. 그리고 쁘레젠떼! 오 나의 주님! 부활의 기쁜소식이 널리 전해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