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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이름이 있는 곳에 내가 있으리라 (마태복음 18장 19~20절)에세이1 2016. 3. 7. 13:12
내 이름이 있는 곳에 내가 있으리라
마태복음 18장 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설교자로서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에도 용서하라는 말을 서스름없이 던지는 나의 모습을 보면 때로는 가식적이지 않는가 생각을하게 된다. 그만큼 용서라는 것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에게 꽤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용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우리라면 당연히 그분의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가 용서하시는 자리에 끊임 없이 찾아오신다.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때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성경은 우리에게 "내 이름이 있는 곳에, 내가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어떠한 자리에 있는 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함께 하는 이로 인하여 우리는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종종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함께' 하라는 것이다.
당신은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야훼, 또 그 누군가의 고백에서 불려진, 여호와이레, 여호와닛시, 라파.. 수 많은 이름들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담고 있다. 치료하셨기에 치료의 하나님, 예비해두셨기에, 예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들을 잘 담아 이야기하고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할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면, 바로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하셨다. 그래서 하나뿐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고, 우리에게 예수와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
예수,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행복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용서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예수님이 계시는 곳마다 기쁨이 일어났다.
죄의 용서를 받은 자가 기쁨을 누렸고, 질병에서 치유를 받은 자마다 기쁨의 환호를 질러댔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관계의 자리에 '용서'를 초청하길 원하고 계신다. 즉, 용서의 하나님을 초대해주길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가, 그러나 그분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그 무엇도 바라지 않으시고 그 어떤 것으로 값을 치루라고 하지도 않으시고 우리에게 용서를 선물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이유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함께 있는 것,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 화평을 누리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우리 삶에 초청하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오해하는 성경구절이 있다면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 들어주신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경구절을 중보기도나 합심기도의 근거로 잡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오류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너희가 하나가 되어 기도 할 수 있을 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곳을 눈여겨 보고, 귀기울여 듣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경의 본문 뒤로, 베드로의 질문도 나온다. 몇번이나 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야합니까? 일곱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번을 일흔번이나 더하라고 하신다. 즉 무한한 용서를 베풀라는 것이다. 그리고 빚을 탕감받은 자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님께 만달란트 만큼의 큰 죄를 값없이 대가 없이 탕감받은 우리내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결국은 백데나리온 만큼의 실수를 한 이웃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빌어먹을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길 바라는가? 내 삶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기쁨이 늘 넘치길 원하는가?
내가 작은 용서하면, 나에게 큰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우린 그날 미친듯이 기뻐 뛰며 찬송을 할 것이다.
"호산나 호산나!"
* 덧붙이는 또 다른 이야기.
"사람들과 관계를 화평케 하는 것이 내가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관계가 화평케 되면 내가 주장하고자 했던 일이 내가 주장하지 않는 동안 이루어 집니다."
"모든 관계의 답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조정민 목사의 '길을 찾는 사람들' 중)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장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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