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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하나님의 여전하신 창조>에세이1 2018. 6. 18. 12:51
<죽음, 하나님의 여전하신 창조>
더이상 반응하지 않고 발달하지 않는 상태.
뇌 그리고 심장, 세포들의 자율적 생성조차도 모두 멈춰버린다. 사람은 그렇게 모든 것이 반응하지 않는 상태, 죽음을 두려워한다.산 사람에게도 '죽은 것과 다름 없다' 라는 말이 적용될때가 있다. 치매로 인해 의미 없는 행동만 반복하는 상태, 또 뇌의 일부가 죽어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그런 상태를 보며 슬픔 가운데서 살아있는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간다.
셰익스피어도 그 죽음에 대해서 말하길 인간이 성숙해지는 것 그것이 죽음에 대한 '마주봄'이라고 이야기한바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의미없어지는 그 날을 앞두고 오늘 하루를 죽음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삶, 그런 삶을 성숙한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죽음이란 때론 유익하다. 두려울지언정 그것이 슬플지언정, 오늘을 더 가치있게,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성숙으로 우리를 끌어주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관계가 더이상 발달하지 않는다면, 서로의 애정표현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 관계는 죽은관계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 죽음 앞에 서 있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어떠한가.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셨다. 피하고 싶으셨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두어가주시길 원했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공포다.
그런 예수는 죽게 된다. 더이상 반응하지 않는 시체가 되어버렸고, 그와 연관됐던 제자들을 비롯한 무수한 사람들과 그 관계가 끊어졌다.그런 죽음 앞에 하나님은 '부활' 을 가져오신다.
죽었지만, 부활이라는 것을 통해 가장 고통스럽고 슬픈 것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내신다.죽음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앞에 우리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망에 지지 않으시며 사망과 다투시고 거기서 생명을 만들어내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우리 생명의 꺼져감, 밤이 찾아와도 주님은 마치 태초의 그때처럼 어둠, 공허함, 가운데 창조를 이루시는 것이다.바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늘 그의 삶에 이루어지길 바랬던 그의 고백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나의 죽음을 고백하는 신앙을 살아가게 된다.
부활이 단지 철학자들의 성숙을 거부하고 어린아이의 기대마냥 그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시리라는 망상이 아니다.
철저하게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던지는 포기가 있어야한다.어쩌면 십자가는 오늘 나에게 포기를 들려주고 있지있을까? 예수님이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창조를 몸소 경험하시고 우리에게 빈 십자가를 선물하셨듯 오늘 교회 안에 걸려있는 십자가는 단지 오로지 하나님의 매일의 창조에 우리를 던지라고 요청 받고 있는지 모른다.
관계 안에서의 포기.
세상살이에서의 욕망의 포기, 소유의 포기.
그 고통스러운 포기,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할 신실하신, 오늘도 끊임없이 창조의 역사를 써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해보리라 기대한다.
그 기대가 우리의 믿음이며, 또한 신앙이기를.죽음, 그것은 여전하신 하나님의 창조로의
가장 위대한 초대이다.'에세이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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