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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행동은 극단적 상황에서 기인한다?>에세이1 2018. 6. 18. 12:52
<극단적 행동은 극단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 아픔의 경험으로 우울증에 놓인 성도를 생각하며..오늘 상담을 하면서 '분노'에 대한 이야기가 또 다뤄졌다.
내 안에 있는 과거 어린시절의 불안과, 어떤 사건들이 나에게 우울과 분노를 가져왔는지 찾아가는 시간을 늘 갖는다.오늘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면 이철희씨가 살아오면서 그 감정들을 분노라는 감정으로 표출하게 된 건 당연해요" 라는 말이 나왔다. 그 분노에 대해서 내면아이에 대하여 이해와 위로를 가져가지만, 그때의 경험에 의한 '극단적' 행동들을 일삼았던 내 행동이 그렇다고 정당화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난 오늘 지금까지 '내 폭력적 행동들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라는 나의 오래된 결정에 반대되는 말을 꺼내버렸다.
"난 조승희를 이해한다" 고 말을 했다.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다. 그는 희대의 총기난사범이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그리고 난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극단적 행동은 늘 극단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라고 내가 말을 했다. 어쩌면 상담사가 나를 치료? 하기 위해 던졌던 말에 내가 괜히 대들어버린격이 됐다. 아군에게 총을 겨눈 격?상담과정이 조승희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저는 조승희가 총기난사를 한 것에 대해서 그 책임이 오로지 조승희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은, 그를 극단적 상황에 몰아넣은 학창시절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건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그들의 죽음은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조승희에게 극단적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극악한 행위의 당사자들을 향한 그의 분노표출이었기에, 조승희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원인을 제공했던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에 대하여 돌을 던져야 합니다. 조승희는 잘 했습니다. 비록 누군가가 죽었고 자신도 죽게 됐지만, 그는 자기 삶에 충실했습니다. 난 위로받아야할 사람들은 총기난사에 죽어간 무고한 사람들보다 먼저 조승희가 위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추모해야 합니다."이런 미친소리를 해댔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냐?' 라고 생각하며 나를 욕하고, 나와 페친을 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 물론 나도 설교, 또 상담(내담자입장이아닌) 상황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성경의 본문을 이용해 용서하자고 이야기를 한다.
쉬운가?
용서가 쉬운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게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그 용서를 위한 죽음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용서가 그렇게 가볍게 되어지는 것인가?용서는 강요되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과거의 불안적 요소들에 대한 선위로가 필요하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과하지 않는 대상을 향해, 그냥 니가 용서 해라 라는 말은 불안을, 그리고 그 불안에 따른 행위표출 중 하나인 분노를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상담사는 내게 과거의 나를 찾아가 "괜찮아" 라고 위로해주라고 한다. 아니,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미안해, 미안했어" 라는 말을 걸어주기 위해 그 당사자가 와주어야 할 일이다.성경의 말을 그대로 갖다가 강요하지 말자.
힘들고, 죽이고 싶다, 또 너무 밉다, 고통스럽다, 이런 말을 꺼내오는 이들에게 너무 쉽게 용서를 강요하지 말자. 그건 또 다시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일 뿐이다.상담사는 내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조승희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해한다는 눈빛을 다시 보내왔다.
그러고 나니 조금 과거의 기억으로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죄인,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 그분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어 예수님과 같은 용서를 하기까지는 꽤 어려운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할 것 같다. 다들 그렇게 걷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용서한척 분노를 숨기고 내 안에 꼭꼭 묻어두고 사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정말로 용서했는가? 정말로 다시 그 이야기가 들춰져도 웃을 수 있고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또한 그래야만 참된 신앙인이고, 성숙한 성도라고 생각하는가?정말 그런거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게 폭력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먼저 내게 위로로 찾아온 후 내가 용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야지, 무작정 십자가를 내세워 용서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나가 뒈지라는 말이다. 대단히 강한 둔기로 가슴을 얻어 쳐 맞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내가 오늘 누군가에게는 말도 안된다는 소리, 개소리, 미친 소리로 들릴만한 이런 글을 왜 적는가?
먼저 울어주라는 이야기다. 먼저 한번이라도 성도의 삶의 아픔 가운데 울어주고 나서 그리고 용서라는 길로 천천히 안내해주라는 거다.
강단에서 폭력의 언어들이, 폭력의 선포들이 던져지는 것에 대한 항의다.
설교가 살인의 도구가 될 수 있음도, 복음이 잘못하면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은혜가 아닌 그 사람들 죽게 만드는 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살로 내모는 매우 폭력적인 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천천히 하자 제발. 십자가에 오르시기까지 수 없이 맞으시고, 수 없이 넘어지시고 하셨던 것처럼, 성도들이 용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천천히 같이 걸어주자. 때로는 구레네시몬처럼 같이 지어주자. 같이 울어주자.
목사는 성도의 구레네시몬이다..
난 오늘 그렇게 내 생각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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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받은 사람이 총기난사를 하든, 살인을 하든,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것이 이 글의 논지가 아닙니다. "용서"라는 "과정의 길"에 대한 이야기 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조승희에 관련한 글이 불쾌하다면 그냥 조용히 페친 끊으시면 됩니다. 괜한 시비나 쓸모없는 감정다툼으로 힘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중한 의견과 논쟁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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