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
<자기배반감, 그리고 위로>에세이1 2018. 6. 18. 12:58
배신감이라는 말과 배반감이라는 말이 비슷한 듯하지만 배반감이라는 말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뚜렷한 대상이 있을 땐 배반감이라는 어휘가 더 어울리면서도 아마도 대상을 특정한다는 부담감에 배신감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쓰게 되는 건가? 괜시리 궁금해진다.오늘은 나 자신에게 배반감을 느낀다. 믿었던 나에게 저버림을 당한 기분이 자기배반감이라고 쓰면 맞는지도 모르겠다.자기배반감은 늘 내 안에 가득하다. 어쩌면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웃프다' 라는 표현도 나에게 갖다대면 때론 그 배반감에 헛웃음이 나는 내 마음을 표현해 내기에 충분한 말일 거 같다.자기배반감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병리학적으로 자아분열쯤 되는 과정의 어느 한 지점쯤에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본다.프로이트가 자아분열을 이야기 할 때..
-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에세이1 2018. 6. 18. 12:57
한 사람과의 만남은 한 존재(存在)와의 대면입니다. 존재라 함은 '있음' 이라는 의미로 쉽게 받아들이면 되겠지요. 내가 오늘 한 사람과의 만남이 가질 때, 나는 비로소 알 수 없는 시간들을 수없이 헤치고온 어느 한 존재의 현재의 '있음' 과의 만남이 됩니다. 내가 한 '있음'과의 만남에서 난 그 '있음'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우리가 그 시간들을 헤아릴 수 없기에 사실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불가능에 도전하며 늘 판단합니다. 무한도전입니다. 저는 저의 '있음' 이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전에, 아니 드러내기도 전에. '있음'의 상(像)이 왜곡되어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먼저는 저의 외모 때문이겠지요? 험상궂게 생긴 얼굴과 짧은 스포츠(때론 삭발)머리에 한 덩치하는 목사. 목회..
-
<어둠, 그곳에 비추어진 빛>에세이1 2018. 6. 18. 12:56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 단지 2000년 전의 사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도 그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깃들여지는 그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으로 다시 일어나시고 들어서셨을 때, 우리 또한 그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 사건입니다.오늘 우리의 삶이 억압, 근심, 고통, 슬픔 가운데 있다해도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결코 그것들이 예수와 우리의 사이의 믿음으로 맺어진 그 결속을 끊어낼 수도 없으며, 우리의 얕은 생명력은 예수의 생명으로 하여금 뿌리 깊은 나무처럼 깊이 그 생명력을 내리고 살아가게 되어 오늘을 버티는 은혜로 살고 있는 것 입니다.예수의 부활을 이해할 때, 우리는 단지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가..
-
<여기 있습니다! "¡presente!" >에세이1 2018. 6. 18. 12:56
부활? 그것이 과연 기쁜 소식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죠!' 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제국의 대량학살과 무자비한 폭력 가운데 죽은 이들은 그저 사라질, 그들이 존재했었음 조차 알지 못하며 그저 잊혀질 그런 사람들, 그런 존재들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 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아직까지 일어난적이 없는 매우 해괴망측한 일이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하더라도, 꿈 속에 망자가 찾아와 억울하게 죽은 자신을 호소하며, 자기를 죽음으로 내 몰았던 사람을 고발하는 정도의 경험만이 그들에게 간혹 있었을법한 일이다.로마라는 제국 앞에서 수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가치 없이 쓰러져 갔다. 전쟁통에 한마디 대변없이 죽어간 수 많은 이들..
-
<워킹데드에 대하여>에세이1 2018. 6. 18. 12:55
오늘 점심 때, 직전글은 워킹데드에 관해 생각을 써봤다. 나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 좀비영화를 꽤나 즐겨보는 편이다. 액션, 조폭들, 코미디 이런 장르는 보지 않는다. 차라리 정서적으로 아련함을 주는 일본영화 중에서도 드라마나 멜로 장르를 즐겨보는 편이다.좀비영화를 보면서 늘 생각해봤다. 과연 좀비와 인간의 공존의 시대가 찾아올까? 알 수 없는 질병의 일종으로 도무지 막아낼 수 없는 병원균의 확산과 인류의 위기. 좀비물의 대부분의 스토리다.좀비물은 사실 후기현대사회의 최종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빈부격차, 개인주의의 왜곡된 극단적 이기주의, 상생보다는 치열한 경쟁 끝에 성공자와 낙오자의 갈라짐. 부의 수치에 따른 인류의 계급화. 이게 시작된 것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지..
-
<워킹데드와 이웃, 그 사이에서>에세이1 2018. 6. 18. 12:54
존중받지 못하는 삶은 죽은 존재와 다름없다. 죽은 존재로 오늘은 살아간다는건 무얼까? 워킹데드? 좀비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아닐까? 아마도 존중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길 위에 내던져진 그들.. 우리는 그렇게 워킹데드가 되어가는 것 같다..배려되어지지 않은 상대방을 향한 가치관의 판단,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우리는 모르고 살아간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는 굴레 안에 그가 서 있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는 생각의 죽음의 자리에 그들을 몰아세우기 때문이다.존중이란 무엇일까? 존재란 무엇일까? 상대가 내게 존재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살아있음 아닐까그 어느 누구도, 그 누군가를 워킹데드의 자리로 내 몰 권리가 없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어쩌면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죽이고..
-
<이력서의 '한 줄 짜리' 하나님>에세이1 2018. 6. 18. 12:54
지금은 30대 후반이지만, 20대 후반즈음에는 정말 어지간하게도 많은 페이퍼를 날렸던것 같다. 다름 아닌 '이력서'. 나야 얼마 안되는 이력서를 작성했었지만, 주변의 친구들은 정말 100장에 가까운 이력서를 작성해서 이곳저곳에 "나를 써주십쇼" 라는 강한 어필이 담긴 자소서와 함께 넣었었다.나도 나름 이력서를 쓸 때 늘 꽤나 신경썼던 부분은 학력과 경력, 자격부분이다. 지금은 다들 스펙이라고 부르는 그것. 내가 지원하고자 했던 회사에 이력서를 쓸 때면 '경영학 전공' 이라는 것을 넣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것이 나를 그래도 '쓸만한 인재입니다.' 라고 검증해주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잠시 스페인에서 공부하고 왔던 그 이력은 내게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잠깐 직장생활을 했었다. 내 이력을 ..
-
<사랑과 우정사이>에세이1 2018. 6. 18. 12:53
내가 중학생때였던가 한창 유행하던 노래가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사이" 였다. 사실 나도 그때 그런 어정쩡한 관계 가운데 있던 소녀(;;)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중학생이 뭔 사랑을 알았겠는가 싶지만, 연인과 친구 사이에서의 그 경계를 모르고, 그 알지 못하는 경계를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보고 싶었던 어린애의 마음이었는지 모른다.하지만, 이제 성인이 되고, 아내와 결혼을 한지 10년을 지내보면서 느끼는 건, 부부의 관계가 사랑과 우정사이에서의 미묘한 애착이라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보았었는지, 책에서 보았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이런 문구가 있었다."Love is blind, but friendship closes its eyes" (사랑은 눈이 머는 것이고, 우정은 눈을 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