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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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용서와 환영의 길을 걸을 것인가?>에세이1 2019. 1. 11. 05:43
# '시간의 역사' 들의 만남 한 사람과의 만남은, 상대방, 그 사람의 '시간의 역사' 와의 만남이다. 한 사람을 향한 존중은, 그가 어떠한 삶의 길을 시간 속에 걸어왔던, 그저 인정해주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관계 안에 있고 또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그 모든 시간들이 나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라는 것은 결코 사소하거나 가볍지 않다. '시간'에는 셀 수 없는 경험과 그 경험에 얻은 지혜와, 때론 상처 받은 순간들에 의한 나의 방어기제와, 사건과 나의 선택들로 다져온 가치 세계관이 담겨져있다. 그래서 어떤이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당신이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또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매우 위대한 일인 것을 명심하십시오" 세계와 세계의 만남. 그 충돌을 매번 경험하고 매 순간 기다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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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받아들여졌다> _폴 틸리히에세이1 2019. 1. 11. 05:38
그저.. 이 사실 하나면 충분할거 같아요.."받아들여졌다."바로, 그 분께.. [그대는 받아들여졌다] _폴 틸리히 그대는 은총에 매혹된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우리는 자신의 삶을 결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은총의 이끌림에 의해 변화하도록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결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은총의 움직임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만한 나머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놀랍게도 은총은 우리가 커다란 고통과 불안에 싸여 있을 때, 오랫동안 추구했던 완벽한 삶이 실현되지 않아 좌절을 겪을 때, 오랜 강박 관념이 갑자기 강하게 엄습해올 때, 실망이 모든 기쁨과 용기를 거두어 갔다고 느낄 때, 그때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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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속으로 찾아오신 주님>에세이1 2019. 1. 6. 23:13
"주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에 있으랴? 높은 곳에 계시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백성의 귀한 이들과 함께 앉게 하시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조차도 한 집에서 떳떳하게 살게하시며,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할렐루야"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어쩌면 이 말은 혁명과도 같은 말일지도 모릅니다.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이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은 그들이 한 행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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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걷는 자>에세이1 2018. 12. 24. 00:15
얼마전 기자 친구로부터 CD 한장을 선물 받았습니다. 제 차는 11년 된 차라 블루투스가 지원되지 않는 차다보니.. 아직도 CD를 구워서 포켓에 넣고 다니며 음악을 듣는데, 늘 출퇴근하며, 촬영지로 이동할 때 마다 음악을 듣는 저에게는 꽤나 좋은 선물이었습니다.본인이 인터뷰했던 수 많은 사람들중에 이 사람들은 정말 좋았다고 소개하며 그때 그분들로부터 받았던 씨디를 제게 주었는데, '시와그림' 이라는 찬양사역자분의 씨디였습니다. 저는 운전할 때 ccm을 거의 듣지 않고, SIA나 METALLICA, 또는 김광석 노래만 듣는데, 오랜만에 차에서 찬양이 흘러나오니 뭐랄까.. 단지 마음을 풀어재끼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에 무언가 담기는 시간이었습니다.씨디의 세번째 곡을 들을 때 참 눈물이 났습니다. 친구가 선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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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재로써(로서의) 교회>에세이1 2018. 12. 24. 00:13
로써와 로서의 문법적 사용이 다르다. 자격/신분의 '로서'가 있고, 도구/수단의 '로써'가 있다. 아마 이 글의 제목은 로서의 라고 써더라도, 로써라고 쓰더라도 두가지의 성격을 모두 가지기 때문에 두가지를 다 붙여봤다.한국교회의 현상을 바라다보면, 교회는 더이상 80~90년대처럼 지역토착의 교회가 아니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교회의 풍토와 현재와는 많이 달라져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이상 교회는 집 앞, 우리동네에 있기 때문에 발걸음을 하게 되는 교회가 아닌 찾아가는 교회의 동향을 가지고 있다. 산업화와 더불어 땅은 도시화를 맞이 하게 되었고, 외면되어지고 구석진 곳의 땅만이 로컬처치의 명분을 유지하고 있다. 농촌의 시골교회들은 밀집형태를 띄지 않고 있었다. 한 마을에는 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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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을 건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에세이1 2018. 6. 18. 13:00
꽉 막힌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면, 어김 없이 기도의 자리는 다른 자리보다 우리가 값지게 여기는 귀한 자리가 된다.그곳에서 나를 상황 가운데 건지실, 또는 넘어서게 하실, 아니면 인정하게 하실 주님을 기대하기 때문이다.기도에 들어선 과정 중에 우리는 '꽉 막힌 상황' 가운데 기도를 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열려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기적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모든 게 다 기적이지 않다는게 문제다. 여기서 신앙인의 오류가 발생한다. 상황에 끌려가는 것. 마치 그것을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인지하지 못한다.우리에게 때로는 침묵하시기도하고, 때로는 기다리게도 하시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 아니 놓친다. 그래서 결국 당장 내 눈 앞에 놓여지는 것을 움켜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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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사건, 그리고 응답>에세이1 2018. 6. 18. 12:59
초대교회 사람들은 요한의 복음서를 받아들었을 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그 선포가 어렵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말씀', '말' 이라는 단어는 '사건'이라는 단어와 함께 연관되어 사용되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였기 때문이죠.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말씀 자체가 사건이 되어버린, 그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의 창조라는 사건을 일으키신 그때가 회자되는 겁니다. 지금도 말씀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심 가운데 울려지는 성령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사건을 일으킵니다.말씀에는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 있으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반응을 통하여 "사건"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용서하라" 라는 말이 들려온다면, 그리고 우리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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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반감, 그리고 위로>에세이1 2018. 6. 18. 12:58
배신감이라는 말과 배반감이라는 말이 비슷한 듯하지만 배반감이라는 말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뚜렷한 대상이 있을 땐 배반감이라는 어휘가 더 어울리면서도 아마도 대상을 특정한다는 부담감에 배신감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쓰게 되는 건가? 괜시리 궁금해진다.오늘은 나 자신에게 배반감을 느낀다. 믿었던 나에게 저버림을 당한 기분이 자기배반감이라고 쓰면 맞는지도 모르겠다.자기배반감은 늘 내 안에 가득하다. 어쩌면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웃프다' 라는 표현도 나에게 갖다대면 때론 그 배반감에 헛웃음이 나는 내 마음을 표현해 내기에 충분한 말일 거 같다.자기배반감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병리학적으로 자아분열쯤 되는 과정의 어느 한 지점쯤에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본다.프로이트가 자아분열을 이야기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