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비재로써(로서의) 교회>에세이1 2018. 12. 24. 00:13
<소비재로써(로서의) 교회>
로써와 로서의 문법적 사용이 다르다. 자격/신분의 '로서'가 있고, 도구/수단의 '로써'가 있다. 아마 이 글의 제목은 로서의 라고 써더라도, 로써라고 쓰더라도 두가지의 성격을 모두 가지기 때문에 두가지를 다 붙여봤다.
한국교회의 현상을 바라다보면, 교회는 더이상 80~90년대처럼 지역토착의 교회가 아니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교회의 풍토와 현재와는 많이 달라져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이상 교회는 집 앞, 우리동네에 있기 때문에 발걸음을 하게 되는 교회가 아닌 찾아가는 교회의 동향을 가지고 있다.
산업화와 더불어 땅은 도시화를 맞이 하게 되었고, 외면되어지고 구석진 곳의 땅만이 로컬처치의 명분을 유지하고 있다.
농촌의 시골교회들은 밀집형태를 띄지 않고 있었다. 한 마을에는 한 교회만 있었을 정도로, 교회는 지역사회의 영성을 책임질, 그리고 지역내에서의 품을 수 있는 범주 안에서 그 성장을 이루고, 그 안에서 교회와 성도들은 상생하고 성장되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땅은 도시화 되어가며, 이제는 한 건물에도 몇개의 교회가 유치되어있는 모습도 보게 된다.과거의 교회와 현재의 교회를 비교한다면, 단편적인 몇가지의 모습으로만 판단했을 경우 집밥과 맛집과 같다고 생각한다.
농경사회와 일부도시의 산업화의 시대에는 교회는 그저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 있는 교회를 다니게 됐었다. 자가용이라는 말이 지금은 낯선 표현이지만, 1가구에 1대가 넘는 차량을 보유하게 된 현재와는 다르게 과거에는 자동차 역시 일부에 해당하는 일이었기에 자가용이라는 말이 통용됐다. 그러한 자가용이 이제는 낯선 것 처럼, 지금은 내 교회라는 말은 어색할 정도다. 이렇듯 과거의 교회는 오늘 음식이 뭐가 나오든 상관없이 마주해야할 집밥 밥상과 같았다. 지역사회 안에서 거주하며 사회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에게는 집밥을 끊어 낼 수 없었던 것이다.하지만 이제 교회는 맛집과 같다. 끌리는 목사가 설교하는 교회, 프로그램이 마음에 드는 교회, 단기선교를 비롯한 내가 선택적으로 봉사, 헌신, 즐거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교회를 선택적으로 결정한다. 도시의 교회가 대형화 되어가며 풍요가 가져온 내부적인 서비스도 많아졌고, 외부로의 영향력 행사 역시 거대한 손이 되었기 때문에 감히 동네수퍼가 대형마트를 당해낼 수 없는 듯 사람들은 일주일에 하루 장보듯 대형교회로 발걸음 하게 됐다.
이제 교회는 소비재에 불과하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설교, 나의 wants를 채워줄 다양한 프로그램을 보유한 교회, 또한 내가 needs하는 것들을 언제든 제공해 줄 수 있는 그곳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그곳에 발걸음을 한다.
교회는 은혜를 사러 가는 곳이며, 은혜로 생활을 할 수 있는 많은 도구들을 제공하는 대형마트와 같다.성도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불과 몇달전의 리서치 결과 "어떤 교회를 다니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50%남짓 "작고 건강한 교회"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작은 개척교회를 가겠느냐는 물음에는 다들 "아니오" 라고 답을 했다.
작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고는 싶지만, 불편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시장 안에 있는 작은 닭집을 본 적이 있다. 즉시로 닭을 잡아 토막내고, 내장제거를 해주는 아주 싱싱한 닭을 파는 집이다. 하지만 그곳은 근처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닭의 판매량을 따라갈 수도 없을 뿐더러, 파리만 날릴뿐이다.
재래시장은 주차도 불편할 뿐더러, 바닥이 청결할 수도 없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그리고 좁은 길목에 사람과 사람이 어깨를 부딪히며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올 검은 봉지는 구매자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소비재로써 개척교회와 작은 교회는 실패작이다.
일부 아류들, 요즘 애들 말로 "아싸"들이나 찾는 곳이거나 정말 특별한 사명감이 있지 않고서는 발 들이지 않는 곳이다.
개척교회와 작은교회만 생닭을 판다는 억지는 부리지 않는다. 대형교회나 작은 교회나 우리에게 제공하는 생닭은 대부분 신선하다.
하지만 대형마트와 재래시장의 접근용이성의 차이와 그밖의 여러가지를 판단한다면, 대형교회와 작은교회의 양립은 불가한 셈이다. 생존의 문제가 그곳에서 발생하고, 또한 생존의 영향안에서 발생하는 경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 Market 안에서 소비자극점을 더이상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이 작은교회에는 없다.
오히려 대형교회를 다녀본 이들이 작은교회를 찾아와 이리저리 손을 뻗으며 대형교회를 흉내라도 내보라며 아우성이다.
작은 재래시장 닭집에 레일조명이며, 에스켈레이터, 자판기를 비롯한 은혜를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도울 수 많은 것들이 요청되어지지만 그것을 받아줄 수 없는 재래시장 작은 닭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역정을 내며 돌아서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장사가 안되지!(그러니까 부흥을 못하지!)교회가 언제부터 소비의 공간이 되어진 것인가, 그 물음에는 그저 시대적, 사회문화적 풍조에 흘러온 역사일 뿐이다 라고 답들을 하지만, 교회의 존립 이유와 성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교회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는 은혜를 나누기 위한 곳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며 성만찬을 나누던 곳이고, 성경의 말씀을 나누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길을 걸어가도록 부름 받는 곳이며, 그러한 그들이 그 일을 일으키고, 서로를 돕고, 격려하며 때로는 위로, 권면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그때처럼 그렇지 않다.
단지 뭉툭하게 던져진 위의 것들은 많은 요소들이 가미되어, 마치 조미료가 듬뿍뿌려진 음식처럼 우리의 식탁을 점령해버렸다.오늘은 이러한 교회에 회의를 느끼기에 충분한 하루였다.
단지 대형교회가 질투나고 시기해서가 아니다. 교회에 요구되어지는 수 많은 요청들을 받아들으며 재래시장 닭집이 1억인테리어를 하는 것과 같은 다소 과장된 부담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내가 은혜를 누리기에 충분한 여러가지 조건을 갖춘 대형마트가 되기 원하는 마음의 소리들을 들으며 재래시장 작은 닭집 사장은 그저 울어버려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이제 가게 문을 닫을 때가 된건가...''에세이1'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난 속으로 찾아오신 주님> (0) 2019.01.06 <물 위를 걷는 자> (0) 2018.12.24 <요단을 건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0) 2018.06.18 <말씀과 사건, 그리고 응답> (0) 2018.06.18 <자기배반감, 그리고 위로> (0) 2018.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