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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을 건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에세이1 2018. 6. 18. 13:00
<요단을 건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꽉 막힌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면, 어김 없이 기도의 자리는 다른 자리보다 우리가 값지게 여기는 귀한 자리가 된다.
그곳에서 나를 상황 가운데 건지실, 또는 넘어서게 하실, 아니면 인정하게 하실 주님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기도에 들어선 과정 중에 우리는 '꽉 막힌 상황' 가운데 기도를 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열려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기적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모든 게 다 기적이지 않다는게 문제다. 여기서 신앙인의 오류가 발생한다.
상황에 끌려가는 것. 마치 그것을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인지하지 못한다.우리에게 때로는 침묵하시기도하고, 때로는 기다리게도 하시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 아니 놓친다. 그래서 결국 당장 내 눈 앞에 놓여지는 것을 움켜쥐게 되고, 또 당장 내 눈 앞에 열린 길을 주님이 예비하신 길이라고 여기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기도 한다.
개척을 하고 5~6년 쯤 되었을 때, 우리 교회는 위기에 놓였었다. 지역재개발로 인해 성도들도 떠나가기 시작해 남은 사람이 몇명 되지도 않게 됐고, 딱히 어디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니 내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보증금으로 들어가있는 천만원이 전부였다.
교회 안에 한 켠을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집과 교회가 하나로 되어있고, 또 보증금 천만원으로 이사할 교회를 찾는다는 건, 성남에서 불가능했다.
그때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주님 길을 열어주세요. 주님 제발 이 상황을 이겨내게 해주세요. 인도해주세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기도했었다.그러던 중, 한 목사님께로 연락이 왔다. 부목사로 오라는 것이다.
성도도 남지 않은 교회, 또 어디론가 이전은 해야하지만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던 나에게 부목사로 오라는 소식은 마치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 것처럼, 인도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뻤다. 매우.
하지만 검증하고 싶었다.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까?"
침묵하셨다. 아무런 마음도 주시지 않았다.
"목사님, 저 못갈 것 같습니다. 지금 있는 교회 지키겠습니다."
라고 전화를 드리고 그 자리를 포기했다.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친한 한분의 목사님, 감독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철희야 힘들지? xx에 교회 있는데 거기가서 목회해봐라. 성도 30~40명 되고, 자립교회야. 너 가서 열심히 하면 금방 부흥할거다"
정말 기도하는 자에게 열어주시는 은혜일까? 두근거렸다.
요새 성도가 있고 자립한 교회를 그냥 간다는건 별로 있지 않은 경우이기에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또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인도하시는 길입니까?"
침묵하셨다. 아무런 마음도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곳으로도 가지 않고 빈교회를 지키게 됐다.생존이 걸린 문제인만큼 너무도 힘든 상황이었다.
빈 교회를 지키며, 교회 폐지가 아닌 유지와 이전을 위한 기도..
나를 위한 생존의 몸부림인가, 예수님의 교회를 위한 생존의 몸부림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얼마든지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을 의존할 수도 있었고, 또 지금 내게 찾아온 좋은 기회들을 그냥 버려버리는 것이 몹시 속이 상하기도 했다. 어쩜 주님은 내게도 이리 가혹하실까 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묵묵히 걷다보니 여기까지 와 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을 읽으며 아브라함이 나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그저 걸었던 모습을 보았다.
아브라함의 기분은 어땠을까? 약속은 받았지만, 쓰시겠다는 약속은 받았지만 속히 내 삶에 아무런 일하심이 느껴지지 않았을 그때.싸구려 간증들을 많이 듣게 된다.
개척 나갔다가 어려워 기도했더니 전에 섬겼던 대형교회 성도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 엄청나게 큰 헌금을 하셔서 해결됐다는 이야기, 유난히 그런 이야기들은 대형교회 부교역자 출신들에게서 많이 접하게 된다.근데 정말 묻고 싶은게 있다.
당신은 상황 가운데 이끌렸는가? 아니면 주님의 확실한 이끄심을 받았는가?나도 만약에 그때 부목사로 갔다면, 또 추천해주신 그 자립교회로 갔다면, 지금 주님께서 나를 쓰기기가 얼마나 어려우셨을까?
그 시간을 거쳐 지금 이곳 복정동이라는 곳을 오게 하시고, 이곳에서 해야할 일도 주셔서 이단사역과 대학선교사역을 하고 있다.아브라함도 아마 그저 묵묵히 걸었기에 결국 이삭을 얻게 되지 않았는가.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의 길을 걷는 동안 얼마나 정착하고 싶고, 이곳이면 좋겠다 라고 여겨졌던 땅들이 많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요단을 건넜다.우리에게는 요단을 건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살기 위해 상황을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목회가 아닌,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그런 목회.
그런 목회의 용기가 필요하다.목회는 주님의 일이지, 우리의 먹고 마심을 위한 수단이 아니기때문이다.
우리에게 목회가 무엇인지 늘 기억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에세이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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