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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속으로 찾아오신 주님>에세이1 2019. 1. 6. 23:13
<가난 속으로 찾아오신 주님>
"주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에 있으랴?
높은 곳에 계시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백성의 귀한 이들과 함께 앉게 하시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조차도
한 집에서 떳떳하게 살게하시며,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할렐루야"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어쩌면 이 말은 혁명과도 같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이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은 그들이 한 행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그들을 선택하신 이유를,
그들이 가장 연약했기 때문에, 가장 무력한 공동체였기 때문에,
노예이자 추방된 이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속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누구에게 찾아오셨는지를요.
우리 주님은 기득권을 가진,
또 경건한 자들과 함께 했던 이들을 찾아오신 분이 아니셨으며,
오히려 죄인이라고 불리우던 세리와 같은 자들,
또한 장애를 가져 민중 속에 어울릴 수 없었던 병자인 죄인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 바로 주님을 몸소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육신은 우리에게 혁명적인 것입니다.
가장 연약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베푸셨습니다.
가장 가난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선물을 주셨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이 몸소 자신의 육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가난한 우리 마음속과 삶속으로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존엄성이 가장 위협받는 곳으로 부르시고,또한 우리를 그러한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친히 보내고 계십니다.
주님이 가져오신 풍요로운 사랑이 이곳저곳 마다 흘러 넘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고 무력하기 그지 없는 한 아기를
우리가 따스하게 부드럽게 보살피며 안아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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