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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용서와 환영의 길을 걸을 것인가?>에세이1 2019. 1. 11. 05:43
<우리는 어떻게 용서와 환영의 길을 걸을 것인가?>
# '시간의 역사' 들의 만남
한 사람과의 만남은,
상대방, 그 사람의 '시간의 역사' 와의 만남이다.
한 사람을 향한 존중은, 그가 어떠한 삶의 길을 시간 속에 걸어왔던, 그저 인정해주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관계 안에 있고 또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그 모든 시간들이 나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라는 것은 결코 사소하거나 가볍지 않다.
'시간'에는 셀 수 없는 경험과 그 경험에 얻은 지혜와, 때론 상처 받은 순간들에
의한 나의 방어기제와, 사건과 나의 선택들로 다져온 가치 세계관이 담겨져있다.
그래서 어떤이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당신이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또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매우 위대한 일인 것을 명심하십시오"세계와 세계의 만남.
그 충돌을 매번 경험하고 매 순간 기다리며 우리는 어떠한 시선과 마음으로 준비하는가,
이런 상상을 한다.
지구, 아시아대륙, 동쪽 대한민국, 성남의 어느 한 동네에서 마주친 미지의 대상과의 조우.
"어서와 지구는 처음이지?"
마치 미확인생물체(우주인)을 환영하듯,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김과,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가짜 전이해를 없앤다면 그 만남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매일 우주를 만나는 우리
난 오늘도 우주를 만난다.
그리고 난 내일도 우주을 만난다.
(쓰고 보니 어디서 많이 읽어본 이단교리같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에서 지난 6월에 통일(?)이후 처음으로 국민(인민)시위가 있었다고 한다.공안들과 인민들의 큰 마찰이 일어나 최루탄이 쏘아지고 난리가 났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중국인 관광객과 그들을 인솔하는 한 중국인가이드로 인해 발생됐다.중국은 거대하고 웅장한 유산들이 많다. 중국인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경복궁이나 다른 우리 문화제를 보고도 감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문화유산들에 비해 너무도 작고 초라해보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도 중국인들의 시각은 동일했다.
한 관광지에서 중국인 가이드가 "우리 중국의 천안문과 비교해도 너무 보잘것 없는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너무도 우스운 일이다" 라는 해설을 했고 중국인 여행객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대며 비웃었다고 한다.
그때 하필이면 베트남의 고위급간부가 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거다.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중국인 관광객을 받지 말자고 시위가 일어났던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인의 세계, 시간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관계 가운데서도 얼마나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가? 크고 작게, 또 겉으로 표출하기도 하지만 존중받지 못한 누군가는 속으로 그 감정을 추스려야하는 고통을 스스로 감내야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공존으로 향하는 길
세계의 존중, 시간의 역사에 대한 존중. 이것은 우리가 타인을 나의 바운드리 안으로 초대할 때,그리고 또 앞으로 우리에게 열려질 시간의 역사를 함께 걸어가는, 그리고 공존하는 방법이다.
내일은 우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자.
마치 고립돼있던 두 나라가 사신을 통해 서로의 문물을 교류했던 것처럼,우리의 배려 깊은 말 한마디가 사신의 역할을 잘 해내고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세계의 교류이며 나와 너의 만남의 시작이다.# 공존에는 용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쩌면 용서라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나의 세계가 상대방의 작은 말 한마디로 훼손당하고, 파괴되어지는 경험이 우리에게 적잖게 일어나고,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세계, 즉 나라는 존재가 있기까지의 시간들,
그 시간들이 만들어 쌓여 몸이 된 우리의 자아가 인정되어지지 않기에 우리는 분노하며,
서운해 하고, 아쉬워하며 갈등하며 대립한다. 용서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나의 나 됨을 거절당한 상대를 향해 "그래 거절 당하기 마땅하다" 라고자기 포기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용서일지도 모른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용서를 요청한다.특히나 우리의 구원자, 대속자로 오신 예수께서는 용서에 대해서 더더욱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그러한 예수의 명령은 우리에게 심각한 거부감과 동시에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종교적 압박감으로 우리는 짓누르게 된다.
예수의 용서의 요청,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존재, 나의 세계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신앙적 고백안에서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께서 먼저 존중해주신 나
다윗의 시편에서의 고백처럼,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부터,또한 자기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작은 이정표를 발견한 거나 다름없다.
나의 세계는 어디에 속해있는가?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어디로부터 인정되어지는가?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존중받는 우리의 세계가 되기에
우리는 하늘에서 요청하는 용서가 어쩌면 우리를 향한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나의 세계와 존재가 무참하게 땅에서 짓밟히고 있을 때,예수는 그러한 나의 존재를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신다.
그러면서 우리의 가치와 우리를 향한 사랑과, 우리의 세계를 존중해 주시며,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 삶을 걸어갈 것을, 그렇게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며,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으로 주저 앉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다시 또 다른 세계, 즉 타자와의 친교로 우리를 내보내주신다.
동방정교회의 지지울라스는 "친교로서의 존재" 혹은 "연합으로서의 존재" 라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저서를 냈다.
우리에게 친교, 연합, "communion" 이라는것이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졌고,우리에게 또 어떻게 요청되어지는지를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
# 용서와 환영의 실재
단지 이렇게 글을 정리하고 싶다.
존중 받은 그대가 용서하는 자가 될 수 있다.하지만 그 존중은 하늘에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의 가치, 자존감, 존재이유를 분명하게 세우고 나서는 용서 할 수 있다.
누구든 환영할 수 있다. 더이상 거절 받지 않아도 되며, 거절하지 않는 삶을 살아도 된다.
그리스도가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며,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영원한 소망이 된다.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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